오래전에 어떤 일본인의 홈페이지에서 이런 글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자동카메라에 대한 감상을 피로한 페이지였는데, 당시에 나도 자동 컴팩트 카메라에 상당히 촉각이 곤두서 있던 시절이어서 꽤 장문이었던 게시물을 거부감없이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이 T-PROOF라는 것은 오래전 "야시카"란 카메라 제조사가 존재했던 무렵에 판매가 시작된 "야시카 T"시리즈의 한 모델명으로 일본에서는 "쿄세라 T-PROOF", 일본 이외의 국가(우리나라를 포함)에서는 수출용의 "야시카 T5D"란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T5D는 야시카 T시리즈 단초점 모델의 마지막 버전으로 1994년 생산이 시작된 후 2001년 단종될 때 까지 7년간 판매되었던 장수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즈음해서 <신세기 에반겔리온>으로 널리 알려진 "안노 히데아키(庵野秀明)"감독의 실사 데뷔작 <LOVE&POP>을 보고 영화 속의 여주인공이 목에 걸고 다니는 조그마한 자동 컴팩트 카메라에 상당히 호감을 가졌다고 할까요? 요즘 애용되는 컴팩트 디지털 카메라를 기준으로 보면 그렇게 작지도 않은 사이즈(35mm 풀 프레임 기종)에 두툼한 두께를 가지고 있어 "컴팩트"라는 말이 우습게 들리기도 합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가볍고 휴대하기 편하고 노출이나 초점을 자동으로 조정해주는 35mm 소형 카메라를 알아 보던 중에 T-PROOF의 소개를 접하고 며칠간의 시장조사, 또 며칠간의 판매점조사 그리고 몇 달간의 고민 고민 끝에 남대문에 있는 카메라 전문 매장에서 구입했습니다. 그 때가 2001년 경으로 아마도 제가 구입한 T5D는 거의 마지막 부분의 생산품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스펙을 보자면 별 다른 것이 없습니다. 당시에 일반적으로 많이 판매되던 여타의 컴팩트 자동 카메라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습니다. 레인지 파인더 형식의 이안으로 35mm 단초점 렌즈를 탑재하고있고 DX코드 인식으로 필름의 ISO값을 자동으로 판독해 주며 조그마한 내장 스토로보와 사진 귀퉁이에 촬영 날짜를 넣어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전지는 CR123형 1개를 사용해 36커트 필름 10롤 정도를 촬영 할 수 있습니다.
특징적으로는 생활 방수형 케이스로 각 개폐부 및 셔터 부분의 고무 패킹과 렌즈 하단 부의 배수구 설계로 약한 비를 맞아도 카메라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되어 있고 카메라 상단에 웨이스트 레벨 파인더가 있어 허리 위치에 카메라를 두고 촬영을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캘리포니아 어쩌구 운운하던 렌즈 부분인데, 가격에 걸맞지 않게 칼 짜이스의 T* 테사 35mm F3.5렌즈를 탑재하고 있습니다. 이 렌즈 때문에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많은 애호가들로 부터 호평과 혹평을 달게 받고 있기는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T5D의 렌즈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칼 짜이스라고 해서 핫셀블라드나 롤라이에 탑재되는 오리지널 독일생산품은 아니고 독일의 짜이스재단과 제휴된 야시카(현 쿄세라광학)에서 라이센스로 일본 내에서 생산하는 물건입니다. 요즘 많이 광고되는 소니 캠코더와 디지털 카메라의 Vario Sonnar류의 렌즈와 마찬가지로 저가 제품용으로 생산된 염가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T5D의 렌즈는 포지티브 필름과 네가티브 필름, 컬러와 흑백 필름 모두에서 그리 모나지 않은 묘사력을 보여줍니다. 콘트라스트가 강하고 발색이 공격적이며 해상력이 수준 이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T5D가 자신 보다 몇 단계 상위 기종인 콘탁스 T2나 T3와 그 결과물에 대한 경합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컴팩트 카메라에 짜이스렌즈가 탑재되는 경우 혹은 컴팩트 카메라라고는 하나 그 만듦새나 가격, 결과물이 여느 SLR카메라를 능가하는 경우는 많이 보아 왔습니다. 우선 생산된지 수십년이 지나도록 오래 사랑받고 있는 롤라이35 시리즈(개인적으로는 가장 우수한 소형 카메라라고 생각합니다.)가 칼 짜이스 소나 혹은 테사 렌즈를 탑재하고 있고, 야시카 T의 혈통을 이어 받아 쿄세라 그룹에서 다시 탄생한 콘탁스 T2(오래전에 사용했었는데 그 후속기인 T3 혹은 TVS보다 나는 더 높게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T3, TVS등의 카메라도 짜이스 렌즈를 탑재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니콘35Ti, 라이카 미니룩스(개인적으로 자동 라이카 M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탑재된 40mm 주마리트 렌즈의 품질이 좋습니다.) 등의 고급 컴팩트 카메라들도 나름대로의 특장점을 가지고 많은 사용자들로 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Yashica T5D / FujiFilm Reala 100
T5D를 앞서 언급한 혈통의 카메라들과 비교하는 것은 어쩌면 무리일지 모르겠습니다. 정찰가격이 150만원, 200만원씩 하는 컴팩트 카메라와 20만원짜리 똑딱이(라는 컴팩트 카메라 비하용어가 있습니다.)를 비교한다는 것이 결코 공정하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T5D는 놀라운 결과물을 보여줍니다. 물론 저가 렌즈의 고질적인 문제라 할 수 있는 주변부 광량 부족(최근에 LOMO라는 카메라가 이걸 터널이펙트라는 모호한 용어로 포장된 마케팅 포인트로 크게 성공하기는 했습니다만)이 전체적인 이미지에 악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플라스틱제 카메라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뛰어난 해상력과 농도가 심하게 깊은 착색이 붙은 발색과 계조는 어디에 내어 놓아도 뒤쳐짐이 없을 듯 합니다.
Yashica T5D / FujiFilm Superia 100
내장 스트로보와의 궁합도 괜찮은 편인데, T5D의 특성상 아무 조작 없이 셔터만을 누르는 것으로도 실내 사진에서도 그럴듯한 결과를 보여줍니다. 첨단 스트로보 측광 시스템의 도움없이 이 정도의 결과물이라면 나름대로 합격점을 주고 싶은 생각입니다. 셔터랙이 조금 긴 편입니다. 반 셔터 감도 정확하지 않아 처음 사용할 경우에는 초점을 잡다가 그냥 촬영해 버리는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셔터를 누르고 촬영 까지 약 1.5초 정도의 갭이 생기다 보니 순간적으로 발생한 상황이나 피사체에 대해서 손해를 감수할수 밖에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Yashica T5D / FujiFilm Superia 200
이제는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이 줄어들었고 특히나 자동 컴팩트 카메라는 대부분이 디지털 컴팩트 카메라로 물갈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세상이 변해 버렸습니다. 아무래도 필름 사진이 귀찮고 금전적으로도 약간의 부담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디지털 컴팩트 카메라의 새끼손톱만한 CCD촬상소자가 35mm필름의 박진감 넘치는 프레임과 해상도, 발색, 계조를 만들어 주지는 못합니다. 주머니나 가방에 넣고 다니며 SLR카메라에 뒤지지 않는 고급스럽고 안정적인 사진을 촬영하기에는 아직 디지털 컴팩트 카메라의 갈길은 멀고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렴한 가격과 뛰어난 렌즈를 탑재하고 우수한 결과물을 만들어 주는 35mm 컴팩트 카메라는 아직까지는 버리기 너무나도 아까운 물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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