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tterfly Kiss 21



성혈과 성배

2005/09/21 15:23 도서관/한국어도서
생각이 깊은 기독교인이라면, 예수가 지니는 근원적인 의의는 그가 전파하려 했던 메시지에 있다는 의견에 동의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메시지가 남편이자 아버지이기도 했던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밝혀진다고 해서 그 가치가 떨어질 리는 없을 것이다. 또한 독신자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해서 더욱 타당해질 리도 없을 터이다.

M. 베이젱뜨, R. 리. H. 링컨, 신판<성혈과 성배>, 1996, 런던, 케이프, 서문中

최근 국내외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제대로된 삼류소설(개인적인 생각에) <다빈치 코드>의 영향 때문인지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80년대 이미 번역서가 등장했었지만 당시에 국내 기독교계의 의도적인 방해때문에 그리 주목 받지는 못했었지요. 이번에 재간된 <성혈과 성배>는 1996년 내용상 오류를 수정하고 부록을 첨부했으며 새로운 서문과 종문을 추가한 신판을 기준으로 번역되었고 고유명사 표기의 혼란과 너무나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오탈자를 제외하고는 무난한 번역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성혈과 성배>가 가지는 의미는 대단히 파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서를 종교가 아닌 역사의 관점에서 바라본 수많은 출판물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빈치 코드>를 통해 일반화되어 버린 "십자가에서 죽지 않은 유부남 예수"라는 다소 충격적인 주제를 중립적이고 심도있는 접근 방식으로 풀어가고 있는 <성혈과 성배>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오랜 시간 동안 조사를 거듭한 후 발간한 역사의 시점에서 바라본 성서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조금 씩 배껴와 무지한 대중을 가르치고자 했던 싸구려 소설 <다빈치 코드>와 현재 표절 소송이 진행 중에 있기도 합니다.

<성혈과 성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저자들은 이 책의 준비 단계에서 부터 기독교(정확히는 로마황제가 신성화하고 로마황제에 의해 편찬되었으며 로마황제에 의해 공표된 정통 로마기독교)의 교리를 의도적으로 부정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20세기 초, 프랑스의 한 조그마한 시골마을에 존재했었다고 믿어졌던 보물의 존재에 대한 호기심에 조사를 시작하였고, 이 보물이 중세 유럽에서 많은 재물을 모았으나 이단으로 몰려 사라져 버린 성당기사단의 그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이 기사단에 설립과 몰락에 관련된 시온수도회에 대한 조사로 이어지고 시온수도회는 현재에도 존재하며 그 존재목적이 어떤 소중한 혈통의 보존이라는 단서를 잡게 되면서 처음에 생각했던 보물이 단순히 물질적인 것이 아닌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혈통에 대한 가계도라는 확신 속에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을 수도 있고 결혼을 했을 수도 있으며 그 자손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왕족의 혈통을 이루었을 수도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 뿐입니다. 물론 10년에 걸친 오랜 조사와 연구가 그 기반이 된 것이고요.

이상하게도 <성혈과 성배>가 출판되었을 당시 예수의 혈통들과 사제로서의 권위를 이양받는 대신 왕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해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로서의 권력을 부여하기로 합의했고 이를 파기했다고 의심되는 로마 카톨릭은 침묵으로 일관했고 "마르틴 루터"의 종교계혁을 통해 로마 카톨릭에서 분파된 프로테스탄트(성결회, 감리회, 장로회 기타 등등 이른바 오늘날 우리땅에서 할렐루야 제국을 건설하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는 교구들)는 참을 수 없는 이단의 씨앗, 선정적이고 상업적인 가십 운운하며 과거 도미니크 수도회가 자행했던 비인륜적인 종교재판의 부활까지도 성토했을 정도로 심한 반박을 가했었지요.

"움베르토 에코"전집읽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관심을 가지게 된 성당 기사단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어쩌면 나도 역사와 과학의 선악과라고 하는 두 번째 원죄를 저지른 것은 아닐까 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진화론 보다는 창조론을 더욱 지지합니다. 아울러 복음서의 내용도 그 가르침도 믿음으로 대하려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조물주를 믿고 그 가르침을 믿고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나는 하지만 목사님을 믿지는 않습니다. 아울러 목사님의 가르침도 믿고 싶지 않습니다.

성당기사단에 대한 호기심이 이제는 혈통에 대한 호기심으로 바뀌었고 그래서 혈통에 대한 책을 한권 더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싸구려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도 인용되고 있는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원제 : <옥합을 든 여인>)를 거치고 다시 에코 프로젝트의 마지막에 있는 신판<장미의 이름>으로 복귀할 생각입니다. 과연 혈통에 대한 미스테리, 그 한복판에 서 있는 "옥합을 든 여인", 그녀는 누구일까요? 진실은 너무나도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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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1 15:23 2005/09/2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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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 전집읽기 프로젝트 ~바우돌리노~

2005/07/25 13:37 도서관/한국어도서
"이 세상에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하나뿐이라고 생각하지 말게나. 곧 누군가가, 바우돌리노보다 더한 거짓말쟁이가 그 이야기를 들려줄 걸세"


"움베르토 에코"의 최신작 <바우돌리노>를 완독했습니다. 지금 까지의 에코적 글쓰기에 일대 전환을 일으킨 참신한 작품이자, 사실과 허구, 그 중 논리의 비약을 일삼을 만큼 중세의 허상에 집착한 <바우돌리노>는 지금까지 읽었던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중 가장 "에코"스럽지 못한 텍스트가 아니었나 합니다.

<바우돌리노>는 중세의 <포레스트 검프>라 할 수있겠습니다. 천한 집안 태생으로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바르바로사 프리드리히"의 양아들이 되면서 벌어지는 놀라운 스케일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4차 십자군 원정, 불타는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의 탄생, 성배의 발견, 동방박사의 동방견문록, 요한부제의 왕국 픈다페침과 백인 훈족의 전쟁 등, 11세기 중세 유럽을 아우렀던 대형 사건의 한 복판에 매번 등장하는 "바우돌리노"와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는 엄청난 뻥으로 얼룩진 판타지를 들려줍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이 모든 거짓말의 주체 "바우돌리노"는 자신의 이야기에 과하다 싶을 정도의 진지함을 보여준다는 거지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이 늘 그랬듯이 몇 단계를 거치며 돌입하는 액자 구조 속에 결국 화자는 작가라는 간단한 명제를 생각해 본다면 88년 발표된 <푸코의 추>의 귀신나부랭이들의 위대한 영도자 "에코"의 이중적인 단면을 찾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 것 같습니다.

소설 = 허구 라는 원론을 최대한 증폭 시켰던 "움베르토 에코"의 신작 <바우돌리노>는 허구라는 양념이 역사를 얼마나 뒤틀고 있나에 대한 좋은 교훈은 아니었을까 하네요.

세상이 진실되지 못한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책임이 아닐런지요.

나는 잠시 에코를 떠나 가벼운 텍스트를 한권 정도 거친 후 <장미의 이름>으로 복귀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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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5 13:37 2005/07/25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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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 전집읽기 프로젝트 ~전날의 섬~

2005/06/21 20:39 도서관/한국어도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이라고 믿었던 시절, 땅과 우주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믿었던 시절, 하늘의 별은 태양 저편에 반짝이는 수정이라고 믿었던 시절...

믿음이란 신념으로 수많은 과학자를 화형대에 매달았던 로마기독교의 오류가 논리정연한 과학 앞에 무릅을 꿇기 시작한 17세기는 공명약과 경도에 대한 의문에 가득 찬 대항해시대였습니다.

FujiFilm FinePix S1 Pro / AF Nikkor 50mm F1:1.4 D / Metz 45 CT-1

움베르토 에코의 3번째 소설 <전날의 섬>을 완독했습니다. <장미의 이름>이나 <푸코의 추>에 비해 적은 부피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몇권으로 분권된 전작들과는 달리 700페이지 단권으로 출판된 한국어판의 두께는 적지 않은 압박으로 다가왔습니다. 17세기 경도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태평양을 항해한 이탈리아 귀족의 모험담을 담은 소설은 대략 간략한 네러티브 보다는 그 가지를 이루는, 당시에는 진실로서 받아들여지던 과학적 정의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에 대한 갈구로 가득합니다.

프랑스와 스페인 간에 벌어진 30년 전쟁, 파리의 살롱에서 벌어진 귀족적 지식의 허세, 경도의 비밀을 밝히기 위한 강대국들의 보이지 않는 암투,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짝)사랑의 환상은 에코 특유의 고급스럽고 지적인 문장과 섬세한 묘사를 통해 감동적으로 그려집니다. 지금까지의 에코소설과 마찬가지로 <전날의 섬> 역시 교묘한 액자구조로되어 있습니다. 이태리 하급귀족 "로베르토 라 그리바"가 난파선에서 적었던 수기와 소설을 한 고문서 수집가가 다시 풀어 적은 구조로 되어 있는 <전날의 섬>은 14세기를 배경으로 한 <장미의 이름> 그리고 20세기(이제는 지나가 버린 세기지만)를 배경으로 한 <푸코의 추>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17세기라는 절묘한 설정으로 온갖 미신이 판치고 거짓이 진실로서 대접받는 구태의연한 세상의 인간과 새로운 세상을 향해 새로운 진실을 향해 나아가려 하는 지식인들의 뜨거운 설전을 담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전날의 섬>을 읽으며 오래전 친구 B군에게 빌렸던 책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 났습니다. '94년 출판된 "데이바 소벨"저의 <경도-해상시계이야기(사진의 책은 최근 재판된 삽화가 첨부된 양장본입니다. 나는 96년도 버젼으로 읽었습니다.)>, <전날의 섬>의 주인공 "로베르토"와 유럽의 실력자들이 반드시 손에 넣고 싶어했던 경도의 비밀이 어떻게 인류에게 정복되었는지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전날의 섬>의 참고도서로도 유용할 듯 합니다. 결국 빌려 놓은지 몇년이 지나 어렵사리 찾아내어 읽어 보았을 때 교차하는 만감은 책을 읽으면서 얻을 수 있는 작은 기쁨이 아닐까 하네요. 경도의 비밀은 <전날의 섬>의 세상에서 100여년이 흐른 18세기, 영국의 한 시계수리공이 제작한 해상시계(이제는 크로노미터라고 부르는)에 의해 풀리게 되지요. 달과 목성의 거리와 그 위성들의 움직임으로 경도를 측정하고자 했던 수많은 천문학자들의 훼방과 멸시를 뒤로 하고요. 당시에 천문학적 방법으로 경도를 측정하는데 제 아무리 빨라야 4시간이 넘겨 걸렸다고 합니다. 해상시계를 사용하면 날씨에 관계없이 단 몇십분만에 경도를 알아 낼 수 있었고...

<전날의 섬>의 세계에서 40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앞으로 400년의 시간이 더 흐르면 우리가 지금 진실이라고 믿고 있던 것들이 제 모습을 찾을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리적으로 빛의 속도를 넘어 설 수 없다고 믿었던 시절, 화폐단위로 이루어진 경제 활동이 사회조직의 기반일 수 밖에 없다고 믿었던 시절, 흡연자에게 온갖 박해를 다해 담배를 끊게 만드는 것이 옳았다고 생각했던 시절...

글쎄요. 이 모든 것이 <전날의 섬>에 갖혀 결코 오늘에 이를 수 없는 허상은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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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1 20:39 2005/06/21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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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 전집읽기 프로젝트 ~푸코의 추~

2005/05/20 11:16 도서관/한국어도서
만일에 우리의 가설이 옳다면 성배는...... 그리스도의 피를 받은 후예였고, 이 <왕통>의 수호자가 바로 성당기사단이었다......, 동시에 성배는 글자 그대로 예수의 피를 받아 담은 그릇이었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막달라 마리아의 자궁이었던 것이다.

- M. 베이젱뜨, R. 리. H. 링컨, <성혈과 성배>, 1982, 런던, 케이프, 14장

FujiFilm FinePix S1 Pro / AF Nikkor 50mm F1:1.4 D / Metz 45 CT-1

<푸코의 추>를 완독 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중 가장 난해하고 어렵다고 알려진 <푸코의 추>를 돌파한 것이 이제 팔부능선은 넘은 것 같은 기분입니다. 이 소설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로마 교황청은 공식 미디어를 통해 "신성 모독과 폭력, 냉소주의로 가득 찬 음탕한 쓰레기"라고 즉각적인 비난을 퍼부었고 얼마 전 선종한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조차 공식 강론에서 이 책을 비판하는 발언을 했을 정도로 문제를 일으킨 소설이기도 하지요.

"움베르토 에코"는 영리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소설에서 작가의 존재를 지워 버리는데 능숙한데 첫번째 소설인 <장미의 이름>에서는 소설의 도입부를 통해 이야기가 멜크의 수도사 "아드소"가 썻다고 "마비용"이 주장한 것을 "뱅자민 발레"가 옮겨 적은 것으로 작가의 존재를 희석시켰으며 역시 두 번째 소설인 <푸코의 추>에서는 주인공 "까소봉"이 "야코포 벨보"의 백부의 집에서 이틀전 파리의 국립공예원에서 보낸 하룻밤을 뒤돌아 보며 그날 밤 하루 전 "벨보"의 아파트에서 지난 십여년 간의 일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니 초입부터 뭐가 뭔지 어디가 어딘지 전혀 알 수 없는 미궁 속에 몸서리를 칠 수 밖에 없는 노릇이지요.

지난 일천년을 아우르는 시간에 유럽을 지배했던 밀교와 비밀결사, 은비학과 수비학 그리고 세계정복의 비밀이 마치 실존 하는 것 인 양 디테일하게 묘사되며 그 엄청난 정보량의 압박은 독자를 거의 미치게 만들도록 합니다. 하지만 원작자인 "에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내가 영화 감독으로서 어두운 장면을 연출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장면에서 어두움이 어떤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내가 이 작품에서 온갖 신비로운 마술과 생전 처음 듣는 이름들을 늘어놓는 것은 독자가 유식한 학자여야 한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이상스런 마술들에 둘러싸여 참을 수 없을 만큼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을 강렬하게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나 자신도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경우가 많다."

결국 작가는 <푸코의 추>에 등장하는 모든 컨텐트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는 대신 이야기의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는 하나의 장치로서 이용된 기교라 설명하지만 그 기교가 너무나도 정교하고 정밀하기에 독자들은 그것이 이 책의 본질이라 착각하기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런지...

결국 진실은 없고 맹신만이 존재하는 현대사회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다는 것은 모든 것을 믿는다는 반어법 속에 드러내는 조소와 조롱이 이젠 유럽을 넘어 전세계를 아우루는 로마 기독교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은 아닐까 합니다.

결국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인간이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존재일까요? 아니면 누군가가 우리의 귀를 막고 입을 봉하고 눈에 색안경을 끼워 놓은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들 스스로가 각박한 봉인의 길을 선택한 것일까요? 그래도 세월은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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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20 11:16 2005/05/20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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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 전집읽기 프로젝트 ~장미의 이름~

2005/04/28 17:05 도서관/한국어도서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장미의 이름>은 추리소설로 읽기에는 너무나 고급스럽고 풍성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한 권의 소설 속에 응집된 역사적 철학적 텍스트의 인용이 일만권에 달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니까요. 어찌 보면 이렇게 까다로운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능한 사고의 수준을 단순화 시키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너무 고상하게 혹은 너무 학문적으로 요목 조목 집어 나가려는 시도 보다는 그저 텍스트의 흐름을 즐기는 것에서 그 의미를 찾아 낸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지... 간혹 모든 기호와 상징(영화라던지 음악이라던지 게임이라던지 기타 등등 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에 대해 마치 게임완전공략 수준의 결과를 도출해야 성이 차시는 분들도 계신데 이런 사고의 획일화야 말로 가장 저급한 접근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는 운이 대단히 좋습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장미의 이름>은 각종 매체에서 조사한 해방이후 가장 잘된 번역서란 카테고리에 최고의 자리에 올라 있을 정도로 뛰어난 수준입니다. 86년 초판 발행 이래 92년과 2000년 두 번에 걸친 개정이 있었고 수백 항목에 달하는 각주를 통한 해설은 어떤 언어권의 번역서에서도 혹은 원서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편리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물론 <장미의 이름>의 주석서 혹은 해설서는 많이 나와 있지만 서도요.)


<장미의 이름>은 내가 읽기에 크게 세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14세기 유럽이라는 시대적 역사적 이야기 입니다. 때는 1327년 아비뇽에서 교황에 오른 도미니크회의 "요한22세"는 교황은 재물을 소유해야 할 뿐 아니라 교회의 우두머리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임명하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던 시절입니다. 그는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에 전대를 채웠고 성직을 매매했으며 자신의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박해한 인물로 묘사됩니다. 이런 이유로 수도자는 물질을 소유해서는 안되고 청빈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던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소형제파는 교황에게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지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루드비히 4세"는 이런 프란체스코회 소형제파를 통해 교황을 견제하려고 하는 형국에 교황파(도미니크 수도회)와 황제파(프란체스코 수도회)의 협상이 중립지역인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원에서 열리게 된다는 배경이 이 소설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로마 기독교의 피의 역사 속을 살아야 했던 지식인의 고뇌입니다. 대단히 이데올로기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두 번째 이야기는 속권에 들러 붙어 배를 불리는 (가짜)성직자를 몰아내자는 극단적인 개혁세력에 대한 이단심판과 처형에 대한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현실에 자신의 소신을 제대로 주장하지 못하고 주류세력의 둘레를 겉돌 수 밖에 없던 지식인의 답답한 모습을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줍니다. 세번째 이야기는 소설의 표면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연쇄살인 추리극이 되겠습니다. 묵시록의 시나리오에 따라 벌어지는 7일간의 살인사건과 이 사건을 조사하는 수도사의 이야기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와 잘 맞물려 흥미 진진한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인터넷 도서 판매사이트에서 본 독자 서평에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에 와서야 이 책의 제목인 <장미의 이름>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되었다라고 하신 분도 계신데, <장미의 이름>은 이렇게 딱히 그 의미를 규정할 수 없는 의미의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인디아나 존스류의 활극 액션극을 통해서는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 모든 것에 이거다 저거다 테두리를 둘러야 성이 차는지요. <장미의 이름>에서 악마는 진리에 대한 맹종 및 맹신이라 이야기 합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이 영겁에 달할진데 왜 하나의 길만을 고집 하는가, 아울러 이런 실패에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성급함이란 말도 잊지않고 있습니다. 진리는 오랜 세월의 흐름(인간의 억울하리 마치 짧은 생의 울타리 안이 아닌)속에 존재하는 것이지 제도권 교육에서 모든 것을 취하고자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란 의미로 생각됩니다. <장미의 이름>에는 짧지만 간략한 저자의 집필에 관한 변이 존재합니다. <나는 "장미의 이름"을 이렇게 썻다> 제목 만을 보면 마치 소설에 대한 해설서 같은 이미지를 풍기지만 실제 내용은 소설의 내용과는 거의 무관한 원작자가 생각하는 소설의 범주와 글쓰기의 방법론에 대한 내용이고 두시간 정도면 완독할 수 있는 분량이기에 <장미의 이름>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한번 쯤 보아두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은 94년도출간의 1판이고 최근에는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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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28 17:05 2005/04/28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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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 전집읽기 프로젝트 ~시작하는 말~

2005/04/20 17:44 도서관/한국어도서
최근 다시 읽기 시작한 <장미의 이름> 때문인지 몰라도 문득 다시 한번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소설들을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읽었던 <전날의 섬>은 벌써 10년 전 이야기가 되어 버렸고, 그 뒤로 에코의 소설에 대한 우리말 개역작업이 있어 새로운 판본의 책들이 출판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초판을 구입했던 <푸코의 추>와 <전날의 섬>이 사라져 버린것이지요. 주말에 창고에 들어있는 책 박스를 모두 뜯어 보고 책장을 뒤져 보아도 보이지를 않는 것이 결혼하면서 소중하지 않은 책을 내다 버릴때 휩쓸려 나간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빌려 준 후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더군요.

내가 에코의 책을 알면서 내다버렸을 이유는 없고 여러 책들 사이에 같이 섞여 나간 것일까요? 집사람에게 구박을 받아가며 몇일을 두고 수색했지만 찾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너무나도 억울하고 하소연 할 곳이 없는 일이지만 방법이 없다고 결론짓고 새롭게 책을 구입했습니다. 많이 변했더군요. <장미의 이름>은 260여곳이 수정된 개역 3판이 출간되었고(제가 지금 읽고 있는 것은 개역 2판입니다.) <푸코의 추>도 어렵고 어려운 텍스트에 주석을 첨부하고 완전히 새롭게 번역한 개정판이 출간되었더군요. 상,하 두권이었던 <전날의 섬>은 단권 양장이 되어 있었고, 내가 읽지 못한 새로운 소설 <바우돌리노>도 물론 역자가 바뀌기는 했지만 두권으로 출판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내가 처해있는 경제적 상태가 소설책 몇권 구입하기에 조차 어려울 정도로 힘이 들지만 미래의 나 자신을 위한 투자라 곱씹어 자기합리화를 시키며 모두 구입했습니다.


조만간 완독 할 것이라 생각되는 92년판 2차 개정 <장미의 이름>을 시작으로 저자의 집필 후기라 할 수 있는 <나는 장미의 이름을 이렇게 썻다>, <푸코의 추>의 개정판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바우돌리노> 그리고 새롭게 개정된 <장미의 이름>으로 여정을 마치고저 합니다.

내가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적고 또 쉽게 빨리 읽을 수 없는 에코의 소설이라는 것을 돌아보면 언제 여정이 끝날지 나 자신도 알지 못하지만 몇차례의 개정을 반복하고 새롭게 번역될 정도의 가치를 가지는 소설은 그리 흔치 않은 것이고 나에게는 놓치고 싶지 않은 소중한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회라 생각합니다.

매니어(난 개인적으로 매니어란 말을 아주 싫어합니다만 이 언어에 합당한 분들을 소개할 때에는 이 이상 좋은 표현도 없는 것 같습니다.)분들의 꼼꼼한 질책에 여러 판본으로 진화해 온 <반지의 제왕> 정도가 그럴까요? 하지만 같은 역자의 손에서 새롭게 거듭나는 에코의 소설은 그 심지가 더욱 깊은 것이 아닐런지요?

내가 이탈리아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리지널 출판본을 경험 할 수 없는 것이 통탄할 일이긴 하지만 어줍지 않은 영어 중역본 보다는 우리말 출판본의 품질이 더욱 뛰어난 것이 아닌가 감히 생각해 봅니다.

이십대 중반에 읽었던 텍스트가 나의 인생에 어떻게 관여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제 삼십을 훨씬 넘어 사십에 가까와 진 나는 오래전의 기쁨과 흥분을 다시 한번 만끽하고자 합니다.

"스타트 로사 프리스티나 노미네, 노미나 누다 테네무스 /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지난날의 장미는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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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20 17:44 2005/04/20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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