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을 향해 돌을 던져 보자. 돌은 어느 정도 날아가 땅에 떨어질 것이다. 그런데 이 돌을 일정 속도 이상으로 가속 시키면 땅에 떨어지지 않고 지면과 평행하게 날아간다. 이것이 인공위성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속도를 얻기 위해서는 높이 올라가 대기권을 벗어 나야 하는데 다시 돌아오기 위해 대기권 안으로 진입하면 급격히 속도가 떨어지며 지면으로 낙하한다. 우리가 만들고 있는 기계는 낙하하기 위해 상승하는 기계다. 난 이런 종류의 기계가 좋다.
우선, 우리나라에서는 VHS로 발매된 적이 없는 <오네아미스의 날개 ~왕립우주군(オネアミスの翼 ~王立宇宙軍)>이 어찌하여 VHS카테고리에 들어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연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하나 꼽으라고 하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망설임 없이 들이 대고 있는 <오네아미스의 날개 ~왕립우주군>(현행 공식 명칭은 <왕립우주군>이므로 이하 <왕립우주군>)의 레이저디스크 에디션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낡은 시대의 사람이기 때문에 영화고 음악이고 손에 잡히는 미디어를 좋아합니다. 한 장, 두 장 모으기 시작한 아날로그 소스가 일정 수량이 되어 재생기기에 투자를 할 때 레이저 디스크 보다 훨씬 많은 수량을 가지고 있는 비디오 카셋트 재생기기에 더 투자 해 TBC(Time Based Corrector)및 3D Y/C분리기가 탑재된 고급형 VCR을 구입하였고 레이저 디스크 플레이어는 가장 싼 제품을 구입하였기에, VCR쪽의 재생능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납니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레이저 디스크는 바로 재생하지 않고 3D Y/C분리기를 통해 색과 휘도를 분리한 상태에서 SVHS(VHS의 고화질 규격)에 더빙한 후 TBC를 통해 프레임을 디지털 메모리에 카피 보정한 후 상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장발생 후 재활용 폐품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샘숭 LDP 이후 그림의 떡, 자켓 감상용으로만 보관하던 레이저 디스크를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어 이를 SVHS에 더빙하여 주말을 이용해 다시 한번 돌아 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일본에서는 '87년 극장 공개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최초 공개 후 20년이 지난 올 시월에 극 일부 극장에서 공개되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필름으로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너무나도 아쉽게도 우리나라에 공개된 <왕립우주군>은 지난 '99년 발매된 사운드 리뉴얼의 DVD에디션을 DLP프로젝터를 통해 디지털 상영한 것으로, 나도 이 DVD에디션을 수 년전에 빌려 보았지만 화질이나 음질 모든 면에서 이전에 발매된 레이저 디스크 에디션에 미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차라리 최근에 발매된 블루레이나 HD DVD 에디션으로 상영했었으면 어떠했을까 하지만 세상일이 어찌 내 마음대로 되겠는지요?
<왕립우주군>의 내용을 이야기 하는 것은 참으로 바보스러운 일이 아닐까 합니다. 80년대 말 부터 불기 시작한 일본 애니메이션 붐으로 자막도 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글 번역 대본을 가지고 알음알음 돌고 도는 조악한 화질의 VHS 더빙본을 구해 보던 세대라면 이미 <왕립우주군>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당시 국내에 돌아다니던 <왕립우주군>의 한글 번역 대본이 영어 중역본인 데다 그나마 번역 수준도 좋지 못해 이 불후의 명작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의문도 남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를 돌아볼 때 <왕립우주군>은 몇가지 면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제작비 8억엔이라는 그 때 까지 애니메이션 영화중 가장 비싼 영화이기도 하였고 그 해 가장 흥행이 안된 영화 중 한 편이기도 했습니다.(다행히도 비디오,LD가 오랜 기간 판매호조를 누린 끝에 아직도 사운드 리뉴얼판이나 블루레이, HD DVD로 재판되고 있기는 합니다.) 개인적으로 오타쿠(정보 소비자로서의 히라가나おたく가 아닌 정보 재가공자로서의 가타카나 オタク)업계의 선두주자라고 할 수 있는 "가이낙스"의 창립작(왕립우주군의 제작을 위해 설립된 회사)이기도 하지만 "가이낙스"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DAICON FILM"과 "제네럴 프로덕츠"(왕립우주군에 설정작업으로 참여)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기 때문에 오타쿠(おたく)에서 오타쿠(オタク)로의 변태과정의 한복판에 놓여있는 작품으로 아련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일본 최대의 IT기업인 라이브도어의 "호리에 다카후미(堀江貴文)"사장도 이 작품의 열광 적인 팬이라고 하더군요. 2부의 제작을 독려한 끝에 <푸른 우르(蒼きウル)>라는 제목으로 '92년도 부터 기획이 이루지긴 했지만 결국 결말을 맺지 못했습니다.
'87년 3월자 "키네마 쥰보(キネマ旬報)"에서 본작품에 대해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이 분 요즘들어 더욱 억압적이고 난폭해 진 것 같은데)는 "젊은이들 손으로 만들어 졌다는 이유로 어느 정도 평가는 줄 수 있지만, (로켓트)발사 시 장군이 간단히 발사를 단념한 것"에 분노해 자식 뻘 되는 젊은 감독 "야마가 히로유키(山賀博之)"와 거의 싸움에 가까운 토론을 진행했다고 합니다.(일본어판 위키피디아 왕립우주군 참조)
<왕립우주군>이 공개되었을 당시 월간 "아니메쥬"를 찾아 보며 "대단한 작화"라고 탐복했던 십대 소년은 이제 아이를 가진 사십의 나이가 되어서도 그 때의 그 감동을 잊지 못해 철딱서니없는 짓거리 까지 해가며 다시 한번 구닥다리 아날로그 판을 돌려 봅니다. 다시 돌아 본 <왕립우주군>... 지금에 와서 보니 "리이쿠니"가 몸을 판다는 암시를 주던 기도의 내용 ("너의 입술이 진실을 말하더라도 네 행실의 허위가 네 입술을 더럽히노라..." 어쩌구 하는)이나 마나와 시로쯔그 사이의 무언의 시선처리 같은 부분에 연출력이 조금 떨어진다고 느껴지기는 하지만 참으로 훌륭하고 패기넘치는 일작이 아니었나 합니다. 20년이 지났고, 또 새로운 20년이 지나도 아마도 이 작품에 대한 열정은 쉽게 사그라 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낙하하기 위해 상승하는 기계를 만드는 사람들, 난 그들을 잊고 싶지 않습니다.
최근에 달린 코멘트
Butterfly Kiss 21 - 최근 댓글